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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에피쿠로스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는 헬레니즘 시기의 사상가였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기에는 전쟁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간의 삶의 본질은 행복’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 행복이라는 말을 구체화시키면 고통은 줄이고 쾌락은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쾌락은 정신적 쾌락과 육체적 쾌락을 모두 의미하는데 육체적 쾌락은 적당한 정도만 추구하고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주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성적인 활동이 있어야만 쾌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높임으로써 진정한 행복의 상태인 영혼의 고요한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쾌락은 행복이었으며 이는 곧 선(善)이었다.



 한편, 그는 이러한 평정심을 공적인 생활과 기존의 신화적인 세계관이 무너뜨린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공적인 일에 관심을 상관하지 않으며 대신에 우정을 향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세계관을 부정했는데, 신의 존재는 여전히 인정했지만, 신이 우리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는 것은 부정하였다. 또한 그는 죽음과 인간 현존재의 무상함과 관련된 문제 또한 해결해야했다. 왜냐하면 죽음과 인간 현존재의 무상함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과 관련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한다. <대전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그것만을 실재라고 여긴다. <소전제>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가 죽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인간 현존재의 무상함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없어짐에 불과하고 내세의 운명따위는 존재하지 않지 않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먼저, 결론을 말하자면 쾌락≠행복≠선(善)이다. 단순히 쾌락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단기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놓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당장에는 어떤 행동이 고통이 적고 쾌락이 클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고통이 커지고 쾌락이 적어지는 행동이 있을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대신 그 시간에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다. 이렇게 볼 때 단순히 쾌락이 행복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쾌락을 주는 것이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쾌락이 선이라는 말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선(善)의 의미를 정의해야 하는데, 내가 볼 때 , 이 때의 선은 좋고 올바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떠한 행동이 선(善)한 행동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것이 개인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고 올바른가인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개인의 쾌락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이 판단한 쾌락이 선에 합하다고는 볼 수 없다.(좋음, 올바름의 개념 또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작업인 것 같아서 일단은 넘어간다.)



 에피쿠로스가 우정을 중요시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뜬금없이 왠 우정?”이었다. 「철학의 뒤안길」에서는 우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나타나있지 않아서 다른 문헌을 참고하였다. 그 책에서는 ‘우정없이는 안정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즉, 우정이 우리를 안정되고 평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우정은 이상적인 우정을 말한 것 같다. 항상 서로를 신뢰하고 도움을 주는 관계 따위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것이 쉽지 않다. 서로 갈등을 하기도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못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우정이 이상적인 우정이라면 이상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우정과는 다른 색다른 쾌락을 선사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쾌락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우리의 행복감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삶을 안정되고 평온하게 사는데 기여할 것이다. 아니면,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현실에서의 우정은 위에서 이상적인 우정과 다르게 가끔 갈등도 존재하고 고통도 존재하지만, 장기적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고통보다는 큰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랑 또한 추구해야한다. 사랑 또한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다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고통보다 큰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잘 못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그것만을 실재라고 여긴다.’ 라는 에피쿠로스의 대전제에서 우선 ‘느낀다’의 의미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느낀다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감각적으로, 오감으로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감각뿐만 아니라 이성 즉 사유를 통해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가 첫 번째의 의미로 느낀다를 사용했을 경우 사랑, 우정 따위의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가 오감을 통해서 인지할 수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우정, 사랑은 명백히 존재하므로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틀린게 된다. 또한 두 번째의 의미로 느낀다를 사용했을 경우 우리는 죽음의 개념을 이성을 통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에피쿠로스의 소전제가 잘 못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단논법의 논증에서 대전제 혹은 소전제가 틀릴 경우, 그 논증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잘 못 되었다.



 프린트에 있는 ‘<결론>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소전제>이것이 원소로 분해될 때 육체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전제>감각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 또한 앞에서 반박한 문장과 거의 비슷하다. 이 문장 또한 연역적인 논증으로 구성되있고 대전제에 문제가 있다. 대전제의 문장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만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 로 바꿔쓸 수 있다. 우정 따위는 감각으로 느낄 수 없지만 우리에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러한 가치는 에피쿠로스 스스로도 인정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잘 못 되었다.



 프린트의 문장중 -현명하고 평안하게 의롭게 살지 않고 즐겁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즐겁게 살지 않고 현명하고 평안하게 의롭게 산다는 것도 불가능하다.-에서 현명한 것과 평안하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에게 왜 중요한지는 알겠는데, 의롭게 산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에게 왜 중요한지를 모르겠다. 현명하게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유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신에게 더 큰 쾌락을 안겨주는가를 판단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이성적인 사유를 하며 현명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평안하게 산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의 상태인 마음의 평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의롭게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혼자 추측해 보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우정 따위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 그들에게 의롭게 행동해라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